우리나라 최초의 소방기구를 없앤 놈
컨텐츠 정보
- 3 조회
-
목록
본문
세종 때 한양 대 화재를 겪자, 세종은 금화도감을 설치해서 화재로 고통받는 백성과 재산 피해가 없도록 조치했다.
한양 대 화재는 방화로 인명 피해가 32명 이상, 민가 약 2400여채가 소실된 큰 사건이었다. (방화범들은 전원 능지처사, 가족들 중 남성 은 교형에 처해지는 중벌이 내려졌다.)
한양 대 화재 때 얼마나 위험한 상황 이었냐면 때마침 세종과 세자가 사냥과 군사훈련의 목적을 지닌 "강무"를 위해 다른 지역 으로 가던 중이었다. 당시 임신 중이었던 소헌왕후가 진두지휘해서 화재 피해를 줄이고 종묘에 불이 옮겨 붙는 것 만은 저지하며 불을 껐다.
따라서 금화도감은 한양 대 화재의 피해를 되새기며 향후 발생할 화재를 보다 유연하 게 대 처하기 위한 세종의 후속조치였다. 금화도감은 화재 방지와 개천과 하수구의 수리 및 소통을 담당하고, 화재를 이용한 도적들을 색출하였다.
이후 금화도감은 도성 관리를 맡던 성문도감과 합쳐져 수성금화도감이 되었다. 수성 금화업무 외에도 하천·도랑 소통, 도로·교량 수축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이런 수성금화도감은 세조 때 폐지되어 도성 관리 업무는 공조가, 소방 업무는 한성부가 담당하도록 분리 조치되었다. 업무도 별로 없으니까 재원 낭비 하지 말라는 취지로 폐지한 것 이었다.
당시엔 세조가 필요하다고 여겼고 돈 을 아꼈으니 훌륭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성종 때 화재가 발생해서 민가 수백 호가 활활 불타게 된다. 결국 조정은"아 이거 이대 로 두면 위험하겠구나;;" 라고 느끼고 수성금화사라는 관청을 새로 만들었다.
성종 때 사람 들은 현재 소방업무의 해이(解弛)로 화재가 자주 일어나고 도둑질을 위한 방화가 많기 때문에 금화도감을 부활시킬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세조가 고의가 아니었다고 해도 세조의 조치 이후 화재 피해가 크게 발생했으니 비판 을 받을 수 밖에.
세조 특: 자기가 나름 똑똑하고 뛰어나다고 자기 생각대 로 판 단해서 제도를 고침.
단점: 근시안 적임. 그게 니보다 뛰어난 세종이 만든 거라는 건 생각 안 함.
관련자료
-
이전
-
다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