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압) 북한으로 간 사람 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컨텐츠 정보
- 66 조회
-
목록
본문
"드디어 해방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해방 이후 한국 에는 두 세력이 들어온다.
나진과 웅기에 상륙하여 한반도로 진주했던 소련군과,
미소공동 위원회를 열어 여러 협의를 거쳤으나
안 타깝게도 남북으로 분단되는 것 을 막지는 못 하고
대 충 여러 일들(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 오보사건..등등)로 인해 분단을 더 부채질만 했다.
그리고 한국 전쟁중에 납북되어 끌려갔던 인물들이 많았는데,
이 글에서는 북으로 갔던 사람 들의 행적과 말년 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1. 김원봉
당연히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으니,
그가 왜 북한으로 넘어갔고, 또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자.
??? : 너 빨갱이지? 조사 좀 받자.
희대 의 악질 친일파 경찰이자,
대한민국 에서도 손꼽히는 고문기술자, 노덕술.
노덕술은 김원봉을 잡아다가, 조사하였으나
(일설에는 노덕술이 김원봉의 뺨을 때리고, 고문을 했다는 말이 있지만
이를 뒷받침해주는 증거가 희박하다보니 이 부분은 생략하겠다)
"이 사람 은 무코하다. 팔리팔리 풀어줘라."
미군정은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 못 해 김원봉을 풀어주라고 한다.
"내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 에서 일본 놈과 싸울 때도 한 번도 이런 수모를 당한 일이 없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의해 수갑을 차 다니, 이럴 수가 있소?"
김원봉은 본인이 체포되었다는 것 ,
그리고 빨갱이라는 모욕까지 당했기에 억 울했고,
사흘 밤낮을 울다가 결국 1948년 ,
김구와 함께 북한으로 가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했다가
본인은 내려가지 않고, 북한에 남기로 결정한다.
김원봉은 결국 북한으로 넘어가 국가검열상이라는 장관 자리에 오르게 된다.
또한 자신의 첩보활동 (의열단) 능력을 살려
해방 정국, 그리고 한국 전쟁 당시
대 남공작활동 의 업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그렇게 북한에서 잘 사나 싶었지만...
자신의 파벌을 제외한 다른 파벌들을 하나하나 숙청해나갔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김원봉이었다.
김일성은 김원봉의 의열단 조직능력이나, 해방 이후~한국 전쟁 당시
그가 보여주었던 조직 관리 능력을 당연히 눈엣가시로 여겼을 것 이고,
다른 파벌들이 김일성을 공격한 사건인 8월 종파사건을 계기로 삼아
김원봉을 숙청시키기에 이른다.
결국 김원봉은 쥐도새도 모르게 숙청된 것 이다.
2. 최승희
사실 최승희는 공산주의에 대 해서 별 생각도 없었고,
김일성에 대 해서도 당연히 별 생각은 없었다.
그랬던 최승희는 왜 북으로 건너간 것 일까?
최승희는 일제시대 에 일본 군 위문공연을 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최승희가 친일파라는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 한다.
여기서, 최승희에 성격에 대 해서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는 것 이,
최승희는 고집이 세고, 자부심이 강한 사람 이었다.
그런 사람 이 '최승희를 반민특위에 세워라!'와 비스무리한 비난을 듣게되면
당연히 그의 입장에서는 개빡칠 수 밖에 없는 노릇.
"니들이 뭔데 감히 세계적인 나를 욕해?"
라는 생각이라도 한 것 일까, 결국 최승희는 빡쳐서 자신의 남편 이 있는 북으로 넘어가버린다.
일제시대 에는 동 일관이라는 건물로 사용되었고,
지금 이 무용연구소 자리에는 유명한 평양냉면집인 옥류관이 들어서있다.
세계적인 예술가가 자기 나라로 오겠다는데,
얼마나 반갑겠는가. 이용가치가 매우 높은 사람 이었을테니까.
김일성은 최승희무용연구소를 만드는데 도움을 줬고,
한국 전쟁 이후에도 무용예술을 할 수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방소예술단 자격으로 식사자리에 참여한 최승희. 가운데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 이 최승희,
그리고 우측에 있는 인물이 당시 문화 선전상 허정숙이다.
그렇게 꽃 길만 걸을 줄 알았으나...
최승희와 그의 남편 안 막, 그리고 딸 안 성희.
안 막이 8월 종파사건에서 '반당 종파분자'로 낙인찍혀 숙청당하자,
당연히 최승희에 대 해서도 비판 이 들어올 수 밖에 없다.
사실 위에 짤막하게 언급한 최승희의 성격도 한 몫 했는데,
최승희에 대 한 연구로 유명했던 정병호 교수 의 연구에 따르면,
최승희는 수시로
"내가 세계적인 예술가인데"나
“내가 이런 사람 인데 네가 무엇이길래 이러느냐”
와 같은 "마 임마 내가 누군지 알아 임마?"에 준하는 말을 자주 하기도 했고,
이런 드센 성격으로 인해서, 똑같이 드센 문화 선전상 허정숙과도 마찰이 잦았다고 한다.
한국 으로 따지면 문체부 장관에 준하는 자리라고 할 수 있다.
본인도 연안 파에 속했던지라, 김일성에게 숙청당할 뻔 하나
충성맹세를 한 덕에 살아남았다.
허정숙은 자신이 살아남자 마자 최승희를 희생양으로 삼아
자신의 입지를 건재하게 지키려고 했다.
한국 에서는 1991년 에 출판 되었다.
더욱이 최승희가 조선민족무용기본을 쓰면서,
김일성에 대 한 감사나 찬양의 문구를 넣지 않았다고 하였고,
또 최승희와 그의 남편 인 안 막의 집에서 수많은 귀금속이 발견되었다는 것 을 들어
최승희를 스파이 혐의로 몰아 숙청시켜버린다.
3.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고향", "국수"로 유명한 시인 백석.
백석은 조만식 선생 의 러시아어 통역 을 위해 북한으로 올라갔는데,
그 이후로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내려오지 않은 채 계속 북한에서 살았다.
한국 전쟁 당시에도 별다른 활동 은 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싶었던 문화 예술을 하다가,
북한에서 '붉은 편지 사건'이라는 희대 의 문화 탄압정책 이 일어나는데,
천리마 운동 이 일어나던 도중,
백석은 전후복구 과정도 중요하지만, 문학을 복구하는 것 도 중요하다는 요지의 주장을 펼쳐
북한 정부로부터 '당성이 부족하다'라는 비난을 받고,
모든 창작활동 을 금지하고, 삼수군으로 보내버린다.
여기서 말하는 삼수군은, 김소월 작가가 언급했던 '가면 돌아오지 못 하는 삼수갑산'에 해당하는 그 곳이었다.
그렇게 숙청당하고 사라진 줄 알았으나, 최근 백석이 살아있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의 사진 , 그리고 몇 편의 시가 알려졌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해보겠다.
축복 >
백석 >
이 먼 타관에 온 낯설은 손을 >
이른 새벽부터 집으로 청하는 이웃 있도다. >
어린것 의 첫생일이니 >
어린 것 위해 축복 베풀려는 이웃 있도다. >
이깔나무 대 들보 굵기도 한 집엔 >
정주에, 큰방에, 아이 어른-이웃들이 그득히들 모였는데, >
주인은 감자 국수 눌러, 토장국에 말고 >
콩나물 갓김치를 얹어 대 접을 한다. >
내 들으니 이 집 주인은 고아로 자라난 사람 , >
이 집 안 주인 또한 고아로 자라난 사람 . >
오직 당과 조국의 품안 에서 >
당과 조국을 어버이로 하고 자라난 사람 들. >
그들의 목숨도 사랑도 그리고 생활도 >
당과 조국에서 받은 것 이어라. >
그리고 그들의 귀한 한 점 혈육도 >
당과 조국에서 받은 것 이어라. >
이 아침, 감자국수를 누르고, 콩나물 데워 >
이웃 사람 들을 대 접하는 이 집 주인들의 마음에, >
이 아침 콩나물을 놓은 감자국수를 마주하여 >
이 집 주인들의 대 접을 받는 이웃 사람 들의 마음에 >
가득히 차 오르는 것 은 어린아이에 대 한 간절한 축복 >
그리고 당과 조국의 은혜에 대 한 한량 없는 감사. >
나도 이 아침 축복 받는 어린 것 을 바라보며, >
당과 조국의 은혜속에 태여난 이 어린 생명이 >
당과 조국의 은혜 속에 길고 탈 없는 >
한평생을 누리기와, >
그 한평생이 당과 조국을 기쁘게 하는 >
한평생이 되기를 비노라. >
아무리 북한에서 백석을 '붉은 작가'로 만들려고 애를 써도
역 시 그의 작품 속에 담긴 시골적 향취는 지울 수 없는 것 같다.
백석은 결국, 1996년 이 되어서야
다사다난하고 복잡괴기한 세상으로부터 작별을 맞이한다.
4. 박열
대 역 죄인으로 기소된 몇 안 되는 조선인이자
조선의 아나키스트 박열.
박열은 사실 한국 전쟁 초기까지는 계속 서울 에 있었는데,
북한군이 내려옴에도 불구하고 그는
'독립투사가 도망갈 수는 없다'고 하며 거절했다.
당연히 서울 에 잔류했던 박열은 납북을 당했는데,
북한으로 끌려간 박열은 지속적으로 회유와 협박을 당해서
심기가 상당히 불편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조총련계 간부들이 그를 대 일선전에 이용하기도 했다고.
한편 박열에 관해서 이런 이야기가 보도되기도 했는데,
당시 북한에 있던 친일파들이 박열을 낮잡아보자
박열이 빡쳐서 이 친일파들을 후드려팼다는 말이 있다.
"(중략) 송효성, 김효석, 김칠성등이 술에 취해 주정을 하기 시작 하자
보다못 한 박열이 "무엇이 좋아 야단들인가?"라고 소리치자,
송호성은 키가 작은 박열에게
"너같은 조막동 이는 주객의 기분을 모른단말이야."
하는 바람 에 두 사이에 시비가 벌어졌다.
여기에 또 김칠성까지 뛰어들어,
"저 사람 은 무정부주의자기때문에 우리와는 성격이 틀린다!"라고 말하여
화가 난 박열은
"이 친일파놈들이 무슨 큰 소리냐!" 하고 대 판 싸움이 벌어졌다.
이 통에 김칠성은 박열에게 물려 옷이 갈기갈기 찢어졌고,
간신히 인솔책 임자가 말려 집으로들 돌아갔다.
동 아일보, 1962년 4월 21일 연재 '죽음의 세월' 22 중
박열의 이 불같은 성격으로 인해서 과거 친일파 경력 이 있던 인물들과 마찰이 잦았고,
아무래도 그 탓일까. 박열은 소리소문없이 살다가 1974년 세상을 떠났다.
이 쯤 되면 한 사람 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는데,
"뭐 할 말 없어요?"
"ㅎㅎ;;ㅈㅅ...ㅋㅋ!!!"
천하의 개 씨발새끼가 따로 없다.
관련자료
-
이전
-
다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