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종종 보이는 검에 대한 오해.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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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글을 보면
전쟁에서 근접 전투가 발생할시 무기는 창이 주로 쓰였고
검은 그냥 일상에서의 호신용 무기 또는 부무장이였다.. 라는 말들이 많다
진짜 그랬을까?
16세기 에스파냐의 기사였던 돈 후안 퀴자다는 전투에서 백병전에 돌입하면 첫 번째로 에스터크를 뽑아 들어야 하며,
즉시 갑옷의 약점인 얼굴이나 겨드랑이, 사타구니 같은 갑옷 연결부를 찌르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에스터크가 부러지면 아밍소드를 들고 싸우며, 아밍소드 마저 잃은 기사는 워해머와 단검으로 싸운다.
에스터크.
찌르기에 특화된 검
찌르기에 특화된 만큼 체인메일을 뚫는데 뛰어났고 양손으로 잡았을 때는
판금갑옷의 틈새 등을 노려 찌를 수 있는 정밀함도 가지고 있었다
종종 레이피어와 착각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90년대 한국에 나온 책들 보면 잘못된 정보 존나게 많다)
레이피어는 베기도 가능하며 전쟁터에서 쓰인적이 없고, 이거야 말로 일상 마을에서 차고 다니던 호신용도 였다
15세기경 중세 영어로 쓰여진 헤이스팅스 사본(hastings manus)의 내용에 의하면
잉글랜드 기사는 '아밍소드와 대거를 허리에 차고, 롱소드를 손에 들고' 전장에 나가야 했다
15세기 이탈리아의 군인이자 저술가였던 피에트로 몬테 역시,
에스터크를 "전신 판금갑옷을 입은 중기병들이 전투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무기" 라고 언급했다.
1527년 바야돌리드에서 열린 펠리페 2세
탄생 기념 토너먼트 대회에서, 시합에 참가 하는 기사들은
"상대의 팔을 잡아 꺾거나, 목이나 다른 부분을 잡아 비틀거나, 에스터크로 찌르거나, 검을 빼앗거나 말재갈을 잡아 빼는 등 전쟁의 전투기술(maneras de conbates de guerra)" 을 사용 하지 말 것을 요구받았다.
비잔틴군과 헝가리군이 야전에서 맞붙은 1167년의 시르미온 전투에 대해,
역사가 요안니스 킨나모스(1143-1185)는
'로마군은 창과 검이 부러져도 (남아있는 무기인) 철퇴를 들고 계속 싸웠고
그렇게 해서 살육된 야만인들의 시신으로 들판을 가득 채웠다' 고 묘사했다.
유럽의 상황이 이렇다면
일본은 어떨까?
무로마치 시대 전투에서 사상자 원인 비율
스즈키 마사야의 연구
화살 : 87%
검,나기나타 : 8%
투석 : 3%
창 : 1%
토마스 콘랜의 연구
화살 : 73%
검 : 25%
창 : 2%
중세 시대 말고 근대 시대 기록도 살펴보자
1762년 파리 앵발리드 요양소 입원자 부상 원인 통계
총 : 68%
검 : 14.7%
대포 : 13.4%
총검 : 2.4%
(총검=창 이라고 보면된다. 근대 총검술은 현대 총검술과는 다르게 길이가 길어 창술의 교리를 따른다)
보다시피 원거리 무기 제외하면 창 보다 검의 비율이 높다
ㅡㅡㅡ
동서고금을 통틀어 전투 시작 후 서로 원거리 무기 쏜뒤, 근접 백병전이 시작되면 검도 많이 쓰였다
창은 보통 '집단 전술'로서 밀집대형으로 사용 되는게 주 역할이였다
각잡힌 창방진은 뚫리지 않는 방패의 느낌으로 교착 상태가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창방진 측면으로 우회를 하던 서로 뒤섞인 난전으로 끌고가거나 하는데
이럴 경우 서로 검을 뽑게 되기 때문에 막상 백병전 개싸움 들어가면 검가지고도 많이 싸웠다
기사들의 랜스는 한번 박히면 부러지는 사실상 일회용이였고, 기병 돌격 자체만 랜스로 했다
그 유명한 윙드후사르 기마대도 말에서 내린뒤에는 에스터크 가지고 싸웠다 (아예 기병 돌격을 에스터크 가지고 했던 기록도 있다)
기사한테는 갑옷 틈을 노리는 찌르기용 검이 주력 무기고 (여기에 관절 꺾기, 넘어 뜨리기 같은 소드 레슬링)
의외로 철퇴,워해머 같은 둔기류는 보조용 병기였다
다만 일반 보병들은 창 썼는데
검은 ㅈㄴ비싸고 숙련되는 시간도 오래걸리고, 훈련 비용도 장난 아니라서
농민들은 값싸고 비교적 빨리 익힐수 있어서 1인분 할수 있는 창을 준 것이다
하지만 중세 전장에서 전장의 주인공은 중기병으로 근접 백병전에서의 주무장이 검이였다
p.s
전장에서 검이 거의 안쓰였다 라는 얘기가 많아서 그에 대한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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