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천주교 박해 가 극심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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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黃嗣永, 1775년 ~ 1801년 12월 10일)은 조선 후기의 양반 출신 천주교 신자다. 

본관은 창원. 자는 덕소, 세례명은 알렉시오(Alexis)이다. 정약용의 큰 형인 정약현의 사위로 천주교도가 되었다. 

 

알렉시오라는 세례명은 1794년 조선에 들어온 중국인 천주교 신부 주문모에게 받았다.

 

 

황사영은 조선에서 가톨릭을 탄압하는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제천 배론의 산 속에 있는 굴에 몸을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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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은 굴 속에서 중국 북경에 머물고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고 편지를 썼고, 

2자 가량 되는 명주천에 1만 3,311자를 썼다. 명주천에 썼기에 백서(帛書)라고 부른다. 

 

 

 

백서의 핵심 내용을 요약하자면 

 

청 황제가 조선에 칙명을 보내 탄압을 멈추고 포교를 허락하게 해달라.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만들어 청의 풍속을 따르게 해달라. 

 

청의 친왕(親王)을 조선에 보내 조선의 왕을 청 황제의 부마로 삼아 다음 대의 왕들이 충성을 다하게 하라. 

 

이상의 방안이 먹히지 않을 경우 프랑스 황제가 직접 군대를 보내 조선을 정복해 달라. 

 

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이는 명백한 반역의 소지였으며, 

외세를 끌어들이려는 매국적인 생각이였으며, 장차 서양 열강의 침공을 유발할 수도 있었던 위험한 사건이였다. 

 

이 백서는 국경을 넘기려다 검문에서 발각되었고, 곧 조선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백서가 발견되고 전국적인 조사가 진행되어,

 

사약, 능지처참, 참형 100명, 유배 및 삭탈관직 300명의 대형 탄압으로 확대되었으며

 

백서 사건 이전까지는 그래도 비교적 유하게 처벌되었단 천주학, 서학 신도들이 대대적으로 탄압되고 처형되기에 이른다

 

또 사대부와 조선인들의 인식에 있어 천주교는 내통세력으로 낙인이 찍혀 본격적인 개화가 진행되기 전까지 천주교들은 탄압을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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