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균에 대해 잘못 알려진 사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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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시에 죄없는 백성들을 죽여서 공적을 위조했다

 

일본으로 잡혀간 여자들은 관백(關伯) 평수길(平秀吉)이 엄히 금지시켜 되돌려 보냈는데 수사(원균)가 적선을 쳐부순 날에 배에 가득 실려 있던 아이들과 여자들이 우리 나라 사람이라고 외쳤으나 듣고도 못 들은 척하고 모두 목을 쳤다고 한다. 이로써 송서(宋瑞)의 딸과 손녀도 우리 나라 사람 손에 죽은 것이 아니겠는가.


《정만록》

 

아님 전시에 구해낸 포로도 죽여서 위조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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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문가에서 혼자 이상한 놈이었다

 

1548년(명종 4) 10월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받고 춘천부사(春川府使)로 부임했다가, 1549년 6월 체직되었다.[2] 다시 전라우수사가 되었다. 전라우수사 재직 중, 1552년(명종 6) 제주도에 침투한 왜군을 격퇴하지 않았다 하여 탄핵을 받고 그해 8월 28일 파지도(波知島)로 유배되었다.

1555년(명종 10) 전라우수사 재직 시 전주에 있으면서 왜군침입 보고를 받고도 달량포(達梁浦)에 침입한 왜군을 막지 않았다는 이유로 양사의 탄핵을 받았다. 이후 재상 이준경(李浚慶)이 그를 거두어 서용하여 다시 관직에 올랐고, 1557년(명종 12)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사림파의 비판을 받고 사퇴, 낙향하여 향리에 은거하였다. 그해 8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1562년 6월전라좌도 수군 절도사로 부임했으나 뒤에 사헌부의 거듭된 반발로 체직당하였다. 이후 사림파와 갈등하다가 1563년(명종 18) 경상좌도병마절도사, 경상우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이후 길주목사(吉州牧使)에 이르러 1566년(명종 21) 12월 사헌부로부터 '관고(官庫)의 물건을 실어내어 은(銀)을 사는 밑천으로 전부 투입했다'는 이유와 재산을 증식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폭정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아님 애비 원준량도 개망나니였음

 

 

3. 이순신 보다 그래도 공신위는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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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 아니야 선좆이 이순신, 권율급으로 올려치기 하면서 억지로 1등공신 찍었어

 

4.  왜군이 쳐들어오자 경상 우수영 70척 판옥선이 있는데도 무서워서 불지르고 튀었다.

 

원균 비판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가 이때 원균이 경상우수영 전력 70여척을 전부 자침시켰다며 열변을 토하는 것이다. 전근대 조선수군과 현대 한국해군을 구분하지 못해서 저지르는 실수다. 현대 해군이야 모항에 전투함들이 모여 있고 승조원들이 언제든지 출동지시에 응할수 있도록 대기태세를 갖추고 있지만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키워진 전근대 조선수군은 소규모로 쪼개어 관할 진포에 흩어져 있었다. 

경상우수영이 수영중에 가장 규모가 크다곤 하나 그만큼 관할 구역도 넓어 임진왜란 직전에 8관 16포였다. 70여척의 전선들은 8관 16포에 흩어져 있었지 경상우수영에 모여 있지 않았다. 게다가 배를 움직일 인원들도 항시 배치되어 있지 않다. 조선수군은 상하번으로 나뉘어 근무했고 전시에는 지방관들에게 통보해 병력을 소집하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이건 원균이 태어나서 뒤질때까지 한 일 중에 유일하게 상식적인 행동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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