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식 상하수도와 도시의 오물 처리에 대해서 +한양 똥천지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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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후 도시에 인구가 집중되는 현상은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문제를 만들었다. 바로 분변의 처리였다.
단순히 인간의 분뇨 뿐만 아니라, 가축의 분변 역시 나날이 쌓여갔다. 이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 문제였다.
유럽에서 분뇨를 처리하기 위해 길거리에서 버리는 그림이나, 하이힐의 기원(하이힐의 기원은 딱히 거리의 똥을 피하기위해 신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패션의 일부였다), 향수의 기원을 유럽 도시의 악취에서 찾는 경우도 있다.
이런 그림이나
이런 그림
중세~근대까지 유럽의 대도시는 사실 이런식으로 분변을 처리해왔고, 당연히 더럽다는 인식은 있었으나 딱히 획기적인 방법도 없는지라 어쩔 수 없이 이런 관행은 이어져왔다.
물론 똥냄새를 24시간 맡으면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기에, 화장실과 오물 처리 방법에 대한 발전은 조금씩 이루어졌다.
18세기 Gong farmer 홍보 전단지와 19세기의 삽화
이들은 밤에 변소에서 똥을 퍼올리는 일을 맡았다. 이 똥은 농촌지역 거름으로 쓰기 위해 도시 밖으로 나가거나, 불에 태워졌다. 이시기 화장실은 대체로 지하의 똥구덩이 까지 직통으로 이어져있는 형태거나 요강이었다.
18세기 요강
뭐, 길거리에 똥이 있는 거 보다는 나은 일이지만 비위생적인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드디어 수세식 화장실이 등장한다. 기록을 따지면 16세기에도 등장하지만, 현대식 수세식 화장실에 가까운 물건은 18세기 스코틀랜드 기계공 알렉산더 커밍이 1775년에 특허낸 s트랩이 있는 화장실이다.
알렉산더 커밍의 s트랩 화장실
1851년 만국박람회에 나온 수세식 변기.
그러나 여전히 비싸기 그지없었고, 19세기 까지 상류층이 아닌 이들은 대체로 앞서 말한 방식의 화장실을 써왔다.
수세식 변기의 발전으로 인류는 악취에서 해방되었는가? 그렇지도 않았다.
물로 인변을 흘려보낸다는 아이디어는 눈 앞에서 보기 싫은 오물을 치우는데 성공하였으나, 그 물이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죽음의 강으로 불리던 런던의 템스강
수세식 변기가 차츰 자리를 잡자 도시의 수질 오염 문제가 크게 번졌다. 아무런 정화시설을 거치지 않고 하천헤 똥물을 방류한 결과 똥물이 모조리 템스강으로 흘러내려갔고 1858년 런던에서 대악취 사건이 벌어질 정도였다.
영국은 런던의 공중보건 문제 해결과 하수도 인프라를 건설하기 위해 1848년에 수도권 하수도 위원회(Metropolitan Commission of Sewers)를 설립한다.
특히 런던 대악취 사건과 콜레라의 원인이 나쁜 공기가 아니라 오염된 물에 의함이 1849년에 밝혀지면서 이들의 하수도 시스템 현대화(당시 기준)는 탄력을 얻게된다. 이 위원회는 런던 내의 오래된 하수도와 200,000개의 똥 구덩이를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1882년 런던 하수도 지도
이 역시 당시 세계 최강국인 영국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19세기 말, 세계 최강국이던 영국 조차도 공중 위생에 대해서는 콜레라가 수인성 질병임을 깨닫기 전까지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일뽕 친구들이 종종 가져오는
한양의 비위생을 나타내는 사진
하물며, 동시대 동아시아의 국가가 그것도 조선이 무슨 능력이 있어서 근대적인 하수도를 만들고, 가축과 시민들의 분변을 통제할 수 있었을까? 영국도 19세기 중후반에나 이룩한걸?
한양이 똥천지에 더러웠다는 건 사실이지만, 인구의 갑작스러운 증가에 따른 공중 위생의 악화는 어느나라나 겪은 일이고, 해결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3줄요약
1.근대적 하수도 시스템은 19세기 말에나 나온다
2.그전까지는 유럽도 악취 천지인건 매한가지였다(조금 낫기는 했지만)
3.망조든 조선이 대규모 하수도 사업을 벌일 수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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