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조선군을 건들면 주옥되는 거에요. - 고산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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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조선 9대왕인 성종대.
세조대부터 명과 조선은 서서히 양국의 통제에 반항하기 시작하는 건주위를 상대로 여러 차례 군사정벌을 단행했음.
건주위의 거추였던 이만주의 사살 등 조선군은 명군의 보조전력으로 수차례 정벌에 힘을 더했고 그 덕에 혁혁한 전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건주위를 중심으로 한 서북면 여진족과의 사이도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음.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이 고작 1년 만에 승하하고 그 뒤를 이은 성종은 사실상 세조의 후계자나 마찬가지였음. 때문에 성종대 조선은 서북면을 위협하는 건주위 여진을 상대로 크고 작은 싸움을 계속 벌여야만 했음.
고산리는 강계에 속한 구역으로, 조선 초부터 4군 6진 정벌의 출병기지 역할을 했던 동북면과 서북면 사이, 한반도 북단의 거의 중앙에 위치한 전진기지였음. 이 시기 들어서 고산리는 주변 만포와 더불어 여진 침공에 대항하는 조선의 전방기지 역할을 맡고 있었음.
그럼에도 중요도는 인근 최대 고을이었던 만포보다는 조금 떨어져서 만포의 지성 역할을 하며 주변 여러 소규모 요새들과 함께 만포 방어선을 구축하는 형태의 작은 성이 건설되어 있었음.
그러다 성종 22년.
"지난 8월 21일에 분토 연대 갑사(分土煙臺甲士) 하수영(河水永)이 치보(馳報)하기를, ‘적(賊)의 수효를 기억할 수는 없으나, 황천평(黃川平)으로부터 들어왔다.’ 하였고, 갑사(甲士) 박원산(朴元山)도 또한 치고(馳告)하기를, ‘적(賊)이 자피선(者皮船)954) 을 타고 만포(滿浦)로부터 강을 뒤덮고서 내려온다.’ 하였으며, 이튿날 이른 아침에 첨사(僉使) 강지(姜漬)가 신 등에게 이르기를, ‘적(賊)이 이미 만포(滿浦)를 포위했으니, 즉시 가서 구원(救援)하지 않으면 국가에서는 반드시 우리들에게 죄를 줄 것이다..."
수효를 알 수 없으나, 최소 수천에 달하는 대규모 여진족 병력이 압록강을 도하해 만포 방어선을 급습함.
강을 가득 뒤덮을 정도로 밀려든 여진족 대부대가 최중요 기지인 만포를 이미 덮쳤다는 덮쳤다는 혼란스러운 소식 속에, 고산리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군 지휘관들은 의견이 나뉘었음. 전력을 다해 만포를 구원하러 갈 것이냐, 고산리를 단단히 지킬 것이냐.
당시 고산리성에 주둔 중이던 조선군은 채 100여 명에 못 미친 것으로 보이는데, 서둘러 병력을 반으로 나누어 만포로 지원군을 보내자는 장수들의 의견에 주장이었던 서사명은 반대의 의지를 분명히 함.
"우리 숫자도 얼마 안되는 좁밥이잖아? 적군은 드릅게 많다매? 얼마 되지도 않는 애들 반으로 나누어서 만포로 보냈다가 적들이 여기로 쳐들어오면? 느그 책임 구역은 쌈 싸묵어 부렀어야?"
...딱 봐도 이거 쫄아붙은 게 분명했음. 어찌됐든 주장이었던 서사명의 불호령에 고산리의 조선군은 급한대로 성 안에서 농성 태세를 갖추기 시작함.
조선군은 3인 1조로 조직되어 한 명은 방패수, 한 명은 창수 ,한 명은 궁수 이렇게 성첩 곳곳에 배치되었음.
이 때까지만 해도 고산리 조선군은 만포가 걱정될 뿐이지 자기네들한테 닥칠 일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음.
근데 진짜로 왔네 시벌?
만포가 오히려 페이크였던 것. 만포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압록강을 도하한 수천의 여진족 대군은 만포를 급습하는 듯하더니 주변 일대의 조선군들이 전부 만포로 몰려드는 것을 바라보기만 한 채 조선군과 대치하고만 있었음. 일대 조선군의 시선을 온통 만포로 잡아두는 동안 다른 곳을 치려는 계략이었던 것.
그러는 사이 2천 규모의 또 다른 여진족 대부대가 고산리로 곧장 들이닥친 거였음.
초기부터 명나라의 영향을 짙게 받았던 건주위 답게 얘네들은 일반 여진족 오랑캐들과는 급수가 달랐음. 방패를 죽 늘여 전투대형을 갖추는 것은 물론, 부대를 수백 규모로 나누어 질서 정연하게 고산리성을 포위하는 형태로 포진하고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 들어오는 정석적인 공성전술을 사용할 정도로 제대로 조련된 군대나 다름없었음.
졸지에 망해버린 조선군은 적들이 성 바로 아래까지 밀려들 때까지도 쥐죽은 듯 조용했는데.
응 훼이크야.
사실 고산리 조선군에게는 미리 지시가 내려져 있었음.
"암만 봐도 느네는 존나 정예병은 아니야. 우리는 좁밥이니까 멀리서 쏴봤자 맞추지도 못할 거잖어? 그니까 적군의 성벽 바로 아래까지 왔을 때 갈긴다. ok?"
이 훼이크 한 방에 여진족 대군의 예봉은 무너졌음. 하필이면 딱 제압사격까지 빗발치듯 끝내고 사다리 걸치려고 방패벽 진형이 풀어진 순간 조선군이 바로 머리 위에서 일제사격을 갈겨버린 거임.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하게 전진하면서 대장급이 앞으로 나와 "야이 조선노무쉐끼들아! 오늘이 느그 제삿날이여!"하면서 엄포까지 놓던 여진족은 이 한 방에 와르르 무너짐. 마침 딱 갈겨대기 좋게 다들 성벽 바로 아래 해자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상태라 조선군이 갈겨대는 족족 여진족 전사들은 모가지가 뚫려 쓰러지고 있었음.
이거이거 분위기가 갑자기 이겨부렀는디?
조선군 눈깔이 거기서 뒤집어 짐.
군마에 올라 탄 군관들을 중심으로 성 내의 조선군이 너도나도 성문을 열고 밀고 나가기 시작 함.
2천을 상대로 고작 백 얼마 되는 조선군이 역개돌을 때리는 기깔나는 장면이 펼쳐졌음.
해자에 몰려있던 여진족 돌격대는 해자를 채 벗어나지도 못하고 도륙 당하고 고대로 여진족 본대까지 무너져 달아나기 시작했음.
이미 눈알이 완전히 돌아가버린 조선군은 허겁지겁 물러나는 여진족을 상대로 무려 추격전을 벌였는데, 압록강을 향해 급히 물러나는 여진족 본대를 향해 미친 듯이 돌격을 때리고 있던 당시 고산리 조선군의 규모는 무려 60명.
여진족아 느그 왜 쫓기니...?
거기에 다들 같이 미쳐버렸는지 주변 소규모 기지들에서도 조선군들이 얼레벌레 뛰어나오기 시작했음. 그렇게 또 따라붙은게 대략 조선군 100여 명.
그러니까
조선군 160여 명 > 여진족 2천 명이라는 정신나간 구도의 추격전이 벌어진 것.
이 뭔가 심히 잘못된 추격전은 압록강 강가에 이르기까지 주욱 이어졌음. 여진족은 거기까지 가서야 정신을 좀 차린 것으로 보이는데, 이제 강을 도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뒤에 따라붙은 조선군을 어찌해야만 했을 거임.
거기서 조선군은 강가 높은 언덕 위에 단단히 진을 치고 버티는 여진족 본대와 대치하게 됨. 아 ㅅㅂ 160명 상대로 2천이 배수진이라고!?
고지를 점거한 채 대군이 진을 친 상태로 언덕 아래쪽에 다다른 조선군을 상대로 궁시전을 펼치던 여진족은 그렇게 벌어들인 시간을 이용해 서서히 병력을 나누어 압록강을 도하하기 시작했음.
그리고 여진족 병력의 반수 정도가 압록강을 건너는 배 위에 몸을 실었을 무렵.
군관 이석동이 또 어디서 지원군이랍시고 데리고 뛰어온 10명까지 더해져서 딱 170여 명이었던 조선군이.
개돌을 때렸음.
그러니까 대략 1천을 상회하는 여진족 부대가 진을 치고 있는 고지대를 향해 170명따리의 조선군이 육박전으로 정면공세를 감행한 것.
어어 저거 들어가면 안되는데...?
쳐발랐음. 조선군이 급히 들이치자 아직 고지대에 남아있던 여진족은 대번에 무너져버렸음.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어 여진족들은 진을 치고 있던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지면서 박살이 나고 오히려 이번에는 조선군이 언덕을 점거한 채 아래쪽 여진족들을 향해 화살비를 날리며 무자비하게 도륙하기 시작했음.
허겁지겁 남은 배라도 올라타려던 여진족들은 제풀에 배가 엎어져 단체로 수장쇼를 벌이기도 하고 일부는 아예 도주조차 포기하고서 엎드려 조선군에게 싹싹 빌기까지 했지만 이미 눈깔이 단단히 뒤집어져 뭔가 제대로 잘못 되어버린 조선군에게 자비는 없었음.
언덕 아래에 나자빠진 여진족들은 모조리 썰려나갔고, 강을 건너는 중이던 여진족들 등판에도 무자비하게 화살이 날아들어 박혔음. 일부는 물 속에 빠져 이미 허우적대고 있는데도 조선군은 같이 물에까지 뛰어들어 찔러 죽이거나 강변에서 기다란 몽둥이로 대가리를 내리쳐 쳐죽여 댔음.
개중에는 제발 제 아비만은 살려달라 울며불며 조선군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어린 여진족 전사마저도 있었으나 그딴 거 없고 자식 앞에서 아바지 모가지가...
조선군의 광기가 얼마나 심했던지 강변 반대쪽에서 철수를 지원하고 있던 여진족들이 다 죽었다... 다 죽었다고!하면서 목 놓아 통곡할 정도의 살육전이 펼쳐졌다.
"적(賊)이 반쯤 건넜을 때 아군(我軍)이 급히 공격하니, 적의 형세가 곤궁하여 무너져, 갑옷과 방패를 버리고 다투어 언덕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아군이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언덕 위를 점거하여 내려보고 활을 쏘니 적(賊)은 언덕 아래에서 올려 보고서 쏘았는데, 혹 군사 가운데에 화살을 맞은 자가 7명이었으나 상(傷)하지 않았습니다. 적(賊)은 혹 알몸으로 헤엄쳐서 가기도 하였는데, 아군(我軍)이 이를 쏘니, 적은 모두 빠져 죽었고, 혹은 4, 5명이 한 척의 배를 타려고 다투었는데, 뱃전이 물에 빠지자, 우리 군사가 수 많은 화살을 일시에 쏘았습니다. 그런데 혹은 배를 맞히기도 하고 혹은 적(賊)을 맞히자 스스로 서로 요동(搖動)하여 온 배가 뒤집혀 가라앉는데 또한 그 수효를 알 수가 없었으며, 6명만이 화살을 맞아 크게 상하였으나 물을 헤엄쳐서 건너갔습니다. 적으로 화살을 맞아 죽은 자를 모두 언덕 위로 끌어올려 참(斬)하여 적(賊)에게 보이었더니 적들의 곡성(哭聲)이 하늘에 사무쳤고, 혹 말을 아래위로 달리며 부르기를, ‘와거(吪呿) 와거(吪呿).’ 【와거(吪呿)는 호어(胡語)인데, 이는 다 죽었다고 이름이다.】 하였습니다..."
"어떤 적이 석혈(石穴)에 들어가기에 아군(我軍)이 물가를 따라가면서 쏘려고 하였으나 되지가 않아 신이 장목(長木)을 가지고 끝에 긴 새끼줄을 매달고 새끼줄 끝에 목추(木槌)959) 를 달아 갑사(甲士) 나옥(羅玉)으로 하여금 바위 위에 서서 마구 치게 하니, 마침 적의 머리를 쳤습니다. 적 가운데에서 우리 나라의 말을 아는 자가 활을 분질러 물에 던지고 크게 부르짖기를, ‘내가 처음에 금하였더니 너희가 굳이 나에게 청하여 나로 하여금 처자(妻子)를 볼 수 없게 하고 죽게 하였다.’ 하고, 곧 물가에 넘어졌습니다. 김귀손(金貴孫)이 언덕에 내려가 참(斬)하니, 어떤 적이 머리를 숙이고 손을 모아 울면서, ‘우리 아비를 죽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적 가운데에 우리 나라의 말을 아는 자가 또한 부르짖기를, ‘이미 악인(惡人)을 만났으니, 어찌 다시 살기를 구(求)하겠느냐? 너희들을 반드시 죽여 먹을 것이다.’고 하기에, 신이 편전(片箭)으로 강밖의 말을 탄 적(賊)을 쏘았더니, 곧 땅에 떨어졌고, 갑사(甲士) 전철석(田哲石)이 또 편전(片箭)으로 한 사람을 쏘아 맞히니, 또한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렇게 대규모로 병력을 갖추고 나름 성동격서의 치밀한 작전계획까지 세워 실행되었던 성종대 건주위 여진족의 고산리 침공작전은 뭔가 좀 많이 맛이 가버린 조선군의 잔혹한 살육으로 끝장나고 말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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